포괄임금제 폐지 논의 보수가 앞장서야 (천하람)

포괄임금제 폐지 논의 보수가 앞장서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밀턴 프리드먼이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국내에서도 보수정치인들이 선심성 정책에 반대할 때 자주 활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공짜 점심에 반대하는 보수정당은 포괄임금제가 일으키는 ‘공짜 야근’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짜 야근은 공짜가 아니다.

개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도 심지어 해당 기업에게도 공짜가 아니다.

공짜 야근은 개인의 재충전 시간을, 가족에게는 여가 나아가서는 출산과 돌봄의 여유를 앗아간다. 사회적으로는 미국의 57%에 불과할 정도로 낮은 시간당 노동생산성의 한 원인이 되고, 과로사 등 산재보험 부담을 증대시킨다.

‘인간자유이용권’을 갖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불필요한 회의, 보고, 야근 등이 늘어나면 유능한 인재는 떠나가고 이는 고스란히 고용주의 부담이 된다.

현재 체결된 포괄임금제 계약은 대부분 시대착오적이며 불필요하고, 포괄임금제 도입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직장인이 사인한 포괄임금제 계약의 95% 이상이 무효라고 생각한다.

애당초 근로기준법 어디를 뒤져봐도 ‘포괄임금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괄임금제는 근로기준법에 근거가 없는 것을 사법부가 판결을 통해 창설적으로 인정한 매우 이례적인 제도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근로자에 대하여 기본임금을 결정하고 이를 기초로 각종 수당을 가산하여 합산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중략) 포괄임금제에 의한 임금 지급계약 또는 단체협약을 한 경우 그것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조건을 포함하는 등 근로자에게 불이익하지 않고 여러 사정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유효하다.”고 하면서(대법원 2020. 2. 6. 선고 2015다233579, 233586 판결) 포괄임금제에 대한 ‘약정’이 있고, 그것이 근로자에게 불이익하지 않다면 인정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법원의 태도를, 현업에서는 계약서만 잘 써놓으면 된다는 것으로 해석해서, 근로자가 포괄임금제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실제 야근한 시간과 관계없이 미리 정해놓은 월급만 지급하면 되는 것으로 운영하는 회사가 적지 않다.

2020년 고용노동부가 전국의 10인 이상 사업체 2,522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포괄임금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사업체의 37.7%가 '법정수당을 실제 일한 시간으로 계산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지급한다'고 답했다.

2019년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57.9%가 포괄임금제를 도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법원이 포괄임금제를 도입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은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한정된다.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포괄임금제 계약서를 아무리 체결해도 무효다.

대법원의 표현을 직접 살펴보자.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관한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따른 임금지급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에도 근로시간 수에 상관없이 일정액을 법정수당으로 지급하는 내용의 포괄임금제 방식의 임금 지급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그것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를 위반하는 이상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0. 5. 13. 선고 2008다6052 판결).”

앞서 본 통계에서, 적게는 37.7%에서 많게는 57.9%에 이르는 기업에 모두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일반적인 사무직의 경우 근로시간을 산정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고, 때로 크런치 모드가 필요하다고 평가받는 IT나 게임업계의 경우에도 출퇴근 시간을 변경하거나 야근이 필요할 때 사내 전산망을 통해 미리 신청을 하거나 결재를 받도록 하는 방법으로 근로시간을 산정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심지어 택시기사나 버스 기사처럼 운행시간이 유동적인 관계로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다고 평가되던 업종도 GPS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근로시간을 산정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재택근무를 하는 전문직, 신문사 논설위원급 정규직 칼럼니스트, 산책하며 영감을 떠올릴 여유를 지닌 최상급 디자이너 등 근로시간을 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2023년의 기술 수준에서 ‘근로시간을 산정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소한 일반적인 사무직은 여기에 해당될 리가 없다.

대법원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포괄임금제 약정은 95% 이상 무효라고 판단된다. 회사 상대로 소송하기 쉽지 않으니 다들 참고 사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참고 산다고 하더라도, 고용노동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고용노동부는 말로는 “포괄임금제는 판례나 행정해석에 의해 인정되는 예외적인 임금약정 형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포괄임금제가 무분별하게 확산되어 ‘일반적인 임금약정 형태’가 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이제야 “올해를 포괄임금 오·남용 근절의 원년으로 삼고 전례 없는 강력한 조치를 통해 불법·부당한 행위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하고 있다(이정식 장관, 2월 13일).

그러면서 당초 3월 16일 포괄임금 오남용을 막기 위한 정부의 대책을 발표하기로 했으나, 소위 ‘주 69시간’ 논란 때문에 연기했다고 한다.

포괄임금제를 제대로 수술할 수 있다면, 주 69시간 논란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책목표와 방향성을 정확히 수립하는 것이다.

정부의 생각과 달리 포괄임금제는 오·남용만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광범위하게 도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쉽고 편한 포괄임금제를 내버려두는 이상 개별기업의 오·남용을 근절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고용노동부 공무원을 10배로 늘려도 포괄임금제를 도입한 모든 기업을 모니터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3월 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포괄 임금제는 ‘저임금 더하기 장시간 노동’으로 생각한다"고 인정한 바 있는데, 저임금 더하기 장시간 노동을 야기하는 제도를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

실제로 대통령이 천명한 근로시간 유연화를 달성하려면, ‘무제한 공짜 야근’에 대한 공포가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얼마만큼 일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산정이 이뤄져야 하고, 산정된 연장 근로에 대한 보상이 정확히 이뤄져야 한다. 대부분 근로시간을 정확히 기록하지도 않고, 연장근로에 대한 보상도 이뤄지지 않는 포괄임금제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도 근로시간 유연화 국정과제와 관련하여 포괄임금제 규제를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이데일리, [단독]주 52시간 유연화 尹정부, 文도 못한 포괄임금제 손본다, 2022. 4. 18.).

다만 인수위 백서에는 “근로시간제도의 노사 선택권 확대 및 직무·성과 중심의 세대상생형 임금체계를 확산”한다는 언급만 있고, 포괄임금제에 대한 직접적인 기재는 찾지 못했다.

정부와 집권여당이 포괄임금제 폐지 논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더불어민주당이 관련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논의를 촉발시킨 점은 평가할 부분이 있고, 정치적으로 민주당에 선수를 빼앗긴 부분은 뼈아프지만, 우원식 의원안(의안번호 17588)은 역시나 너무 거칠고 과도하다.

우원식 의원안은 포괄임금제를 전면적으로 제한하면서 사용자에게 개별 근로자의 업무 개시·종료 시간을 일·주·월 단위로 측정하여 기록할 의무까지 부과하고, 근로시간에 대해 사용자와 근로자가 분쟁이 있으면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근로시간 인증까지 신청할 수 있도록 한다는데, 사용자와 고용노동부에 일시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전형적인 민주당 느낌의 법안이다.

현재 대부분의 포괄임금제 계약은 법률적으로 유효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나, 포괄임금제가 필요한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한다. 집권여당은 야당처럼 거칠게 포괄임금제를 일률적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더욱 세밀한 논의를 거쳐 포괄임금제 유효성 기준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실제로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관계로 포괄임금제 도입이 유효적절한 예외적 사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음에도 포괄임금제를 도입한 대부분 사례에 대해서는 적절한 유예기간을 거쳐 포괄임금제 계약을 무효화하여야 한다.

예외를 명확히 규정하기 쉽지 않은 경우 근로소득 상위 2% 내외에만 포괄임금제를 허용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에 살펴보자.

근로시간 내지 근로기준법에 관한 내용은 지속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필자가 당대표 선거 과정에서 드렸던 말씀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민주노총이 정의롭지 않다고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마저 부당해지지 않습니다.“

“한 번쯤 뼈아프게 돌아봐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경제단체의 보도자료만 달달 외워서
국민 앞에 내놓은 적은 없었는지,
왜 일터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한 노동자들의 억울한 사연은
우리당으로 찾아오지 않는지 말입니다.“

“국민의힘은 제1노조와 제2노조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들을 위한 제3노조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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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comments
  1. 2030세대가 얼마나 정책과 이슈에 예민하고 영속적인 지지그룹이 아니라는 건 문재인 정부를 불과 5년전엔 이 세대가 70~80%까지 지지했던 걸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지난 3번의 큰 선거를 겪으며 지금의 보수 지도부와 구태들은 2030세대 지지를 당연한거라 생각하는 거 같아요. 민주당이 포괄임금제 관련 선제적으로 나오니 5년만에 처음으로 일 좀 하네 하는 분위기인데… 총선 때 어쩌려고ㅠㅠ

    앞으로 ‘정책이야기’ 카테고리에 더욱 많은 글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희도 잘 읽고 많이 배울게요.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더 다양하고 세밀한 정책 글들을 기대합니다. 저희 지지자들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더하여 고공행진 팀블로그 홈페이지에서 글의 댓글이 ‘view comment’ 버튼을 눌러야 보이는 것이 아닌, 댓글 펼쳐보기가 default 상태가 되도록 기능 수정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의견 드립니다.

  3. 선제적 담론 발굴 토론 개선책 도출등 보수도 냉정하고 객관적 접근을 통한 노사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해법을 선점해야 한다.여의도 연구원도 있고 당원 토론방도 활용하고 일반인도 접근 가능한 플랫폼도 갖춘다던지 해서 보다 활성화된 논제 논쟁을 유발하는 기초가 되는 고공행진되길 바란다

  4. 야당이 먼저 발의한만큼 여당 의원들이 호응만 해주면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지만 여당쪽 원내 움직임이 없는게 아쉽네요.. 일단 과반이상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이 법안을 추진하려 할 때 훼방을 놓는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당에 큰 타격이 올 것 같은데 고칠부분은 고치고 괜찮은 부분은 수용하면서 잘 협치 했으면 좋겠네요.. 제발 거부권 행사하는 상황까지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1. 검토할단계는 지났습니다, 검토할 시간 국민들은 충분히 줬습니다
      뭐가됐든 앞으로내놓고 국민의평가를 받아야할시기입니다
      이번에 또 밀린 연금대책도 그렇고 한국 국회의원들은 검토만 주구장창하지 뭔가 확실한걸내놓는 꼬라지를 못봤습니다

  5. 포괄임금제 폐지 찬성하면 보수에서 앞장서는 모습도 지지합니다.
    사원, 대리는 적용하지 않지만 과장 이상은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기업은 고용노동부 모니터링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도 궁금.
    빈틈없는 정책 검토 부탁합니다.

  6. 개혁보수의 확고한 투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수가 삽니다.

  7. 경제, 일자리 문제 해결 안하면 2030 지지율 더 떨어진다
    지금도 이미 지지율이 낮은데…
    이대로 가면 총선 패망이다

  8. 앞으로 출산율 관련 정책도 중요하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현시점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정책분야라고 생각하는데 무서울 정도로 정치권과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공행진팀에서 관심갖고 정책을 생각해준다면 출산율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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