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원내 대변인의 발언이었다.
“대정부질문 3일 내내 총리의 태도 중 특이한 부분은 면박을 준 대상이 젊은 정치인,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 여야를 막론하고 중년 남성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응한 적이 있는지 찾아보면 좋겠다. 본인이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캐치한 것 아닌가 싶어서 불쾌했다.“
김한규 의원이 거명한 고민정, 강선우 의원이 정말 대정부질의 자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일까? 김한규 의원이 언급한 청년(“젊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두 의원의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대정부질의는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자리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은 국민의 대표자로부터 질의 받기 위해 단상에 선다. 한덕수 총리가 아무리 적극적인 반박을 했다 해도 일반적인 토론과는 달리 겸허한 태도를 유지했던 이유다.
하물며 고민정, 강선우 의원은 청년이나 여성 할당으로 정치에 입문한 경우도 아니다. 한 총리가 반박한 상대는 ‘국회의원’ 고민정, 강선우 이지, ‘청년여성’ 국회의원 고민정, 강선우가 아니었다.
결국 김 의원은 당사자들조차 언급하지 않은 성별을 끄집어내 두 의원을 ‘약자’의 위치로 전락시켜 정치 공세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한덕수 총리와 고민정, 강선우 의원은 졸지에 행정부의 총리와 입법부의 의원에서 그저 남자, 여자라는 성별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부각해 옹호하면 마치 약자를 위하는 깨어있는 남성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고루한 인식을 들킨 셈이다.
허은아의 서사
고백하자면 나 역시 여자라서 늘 피해를 입는다는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건강 문제로 승무원 일을 그만둔 뒤 석·박사를 마치고 PI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다. ‘내가 전문대 출신이라서’, ‘내가 여성이어서’ 무시당하거나 평가절하 당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감정의 소용돌이가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심은 스스로의 내면을 갉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결과 극복의 서사 대신 피해의식의 서사만 강화했다. 무엇보다 그 의심에서 출발하는 논쟁은 진의를 둘러싼 소모적인 진실게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해의 골은 더 깊어지고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졌다. 김 의원의 발언이 국민들의 냉소적인 반응만 이끌어낸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모두 각자의 취약성을 갖고 살아간다. 국회의원이 되고나서 만나게 된 수많은 국민들은 ‘전문대 출신, 여성, 중소기업 대표’였던 나와 마찬가지로 지역, 학벌, 성별, 나이 등 각자의 다양한 어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내심 그러했듯, ‘OO라서 불이익을 당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서로를 향한 끝없는 ‘피해자 되기’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이다.
정치가 해야 할 일 – 이분법을 넘어
사실 김한규 의원의 발언은 우리 정치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사고방식은 아닐 것이다. 우리 정치가 늘 선거 때마다 시도했던 접근이기도 하다. 청년의 지지율이 낮으면 황급히 청년 정책을 내놓고, 여성 지지율이 낮으면 여성 단체와 간담회를 가진다. 가치가 아닌 특정 정체성과 그 집단에 호소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정체성에 따라(이를테면 성별에 따른 이분법으로) 고통의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취약한 상황을 해결하는 일이다. 성별을 불문하고 청년에게 취업난은 심각한 고통이고, 부자 노인도 그렇지 않은 노인도 질병에는 취약하다. 이처럼 정치가 국민의 취약한 지점을 찾아 해결할 때 오히려 사회적 합의도 만들기 쉽고 통합도 이룰 수 있다.
결국 소모적인 ‘약자 프레임’ 전쟁을 멈춰야 한다. 대정부질의 자리에 선 고민정, 강선우라는 여성은 약자가 아닌 ‘국회의원’이다. ‘중년 남성’ 정치인이 대신 불쾌하고 화내줘야 할 만큼 유약한 존재도 아니다. 김한규 의원의 발언을 들은 두 의원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의 편을 든 ‘중년 남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까, 아니면 이 와중에도 자신들을 ‘청년’, ‘여성’으로 밖에 보지 않는 ’중년 남성‘에게 한심함을 느꼈을까.
4 comments
허의원님 글에 큰공감을 합니다 스마트해 보이는 젊은 남자도 뼈속깊이 남존여비사상이 들어있나 보네요 숨기기나 잘 할것이지 명석한체 하다가 들통났네요
(그리고 의원님 글을 참 읽기쉽고 깊이있게 잘 쓰시네요)
와… 쩐다. 진심 감탄 나오는 필력과 논리 전개. 많은 2030 분들이 꼭 봤으면 하는 글이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력과 앞으로 변헤야 하는 사회의 구상까지 완벽했습니다.
포를 주고 싶어도 줄수가 없네 거 누가 펨코에좀 보내라
국힘 당원들이 정신 차릴 때까지 민주당 찍어야겠다